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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인민재판_5

   17. 무상몰수 무상분배


 "위원장 동무, 한 가지 여쭐 말씸이 있는디요"
  동서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남양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에, 무슨 말씀이신데요"
  이지숙은 언제나처럼 사무적인 태도에다가 친절함이 조화된 그녀 특유의 모습으로 남양댁
에게 눈길을 돌렸다.
  "저어......다른 것이 아니고라, 죄인얼 다루는 디는 꼭 인민재으로 혀야 허는게라?"
  "아니, 그렇지 않아요. 무슨 비밀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거나, 또는 피해자, 그러니까 손해
를 본 사람의 곤란한 입장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민재판처럼 공개하지 않는 재판도 있어요
"
  상대방의 질문 의도를 재빠르게 간파한 이지숙은 두 번의 질문이 필요하지 않도록 대답했
다.
  "옳여! 그런 재판도 있구만이라. 잘 알았구만요"
  이지숙은 남양댁의 입술에 순간적으로 힘이  모아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외서댁 때문이었다. 아무리 동서지간이라 하더라도 감추
어야 할 일은 분명 있을 것이고, 어쩌면 가까운 사이라서 더욱 감출 필요가 있는 일이 있을
수 있었다. 역시 남양댁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돌아갔다. 남양댁은 목골댁을  찾아갔
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허출세에 대한 말을 불쑥 꺼냈다.
  "영 요상하데, 허출세가 아무 벌도 안 받고 그냥 풀려난다고 허드랑께."
  "머시여? 허출세 그 문딩이가?"  목골댁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으쩔끄나,  그눔이 바로
인민재판감인디......" 그녀는 혼자말을 하며 고개며, 어깨며, 팔을  맥 빠지게 늘어뜨려버리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눈치만 지키고 있던 남양댁은 마침내 무릎을 쳤다. 더 볼것도 없는 일이
었다.
  "자네도 그눔한테 당혔제!"
  남양댁은 목골댁 앞으로 얼굴을 바짝 디밀며 낮고 빠르게 말했다.
  "허먼, 자네도 당했단 것이여?"
  목골댁은 맥 빠진 소리였고, 남양댁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워째 근디 자네넌 기운이 그리 펄펄혀?"
  눈물이 크렁해진 목골댁의 말이었다.
  "자네도 기운 내소. 그눔이 그냥 풀려난다는 것은 자네가 워쩐가 보자 허고 나가 꾸민 그
짓말이시. 인자 우리가 서로 당헌 것을 툭 터놓고 알었응께, 남치기야 그눔한테  되갚음허는
일만 남았네. 존 방도가 있응께 기운채리고 나 말 듣소."
  남양댁은 벌떡 일어서더니 두 손으로 치마말기를 야무지게 끌어올리고는 다시 자리를  잡
았다.
  "긍께로 말이시, 나가 여맹위원장을 만내서......"
  남양댁은 이지숙에게 묻고 들은 이야기를 했고, 그러니 이지숙이를  통해 둘이서 당한 일
을 다 털어놓고 허출세의 죄를 따지게 하자고 했다.
  "근디, 발 웂는 말이 천리 가드라고 그 소문이 나불먼 우리 신세가 워찌 되겄어. 그눔한테
원수 갚음 혔다 혀도 우리 신세가 쪽박신세 되야불먼 고것이 멋이겄어."
  목골댁은 울상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위원장 동무가 을매나 딴딴허고 찰방진 여자라고 고런 실답잖은 소문 내겄어? 위원장 동
무럴 믿소."
  "금메, 위원장 동무야 믿제만 그 일얼 워디 혼자 허는 일이겄어? 아무리 인민재판이 아니
라고 혀도 말이 입에서 입으로 왔다리갔다리 허다보면 소문나는 법이제."
  "그려, 자네 말도 틀린 말이 아니시. 긍께 우리찌리 요리 말방아 찧어싸도  아무 소양웁는
일리고, 위원장 동무 만내갖고 우리 이약허기 전에 소문이  날랑가, 안 날랑가, 고것부텀 세
세하게 알아보는 것이 워쩌겄는가?"
  "금메......"
  목골댁은 남양댁에게 이끌려 이지숙을 만나러 갔다.
  "쩌어...... 그 인민재판 아닌 재판을 허먼 손해본 사람이  당헌 일이 소문이 나는지, 안 나
는지럴 알았으면 쓰겄는디요."

[태백산맥] 인민재판_4

    16. 양쪽을 다 미워하는 아이   중에서.... 


"내일 아칙 열시에  남국민핵교 마당에서 인민재판이  열린께로 짬내서 나가보도록  허씨
요."
  "인민재판이어라? 인공허고첨 열리는 것이제라?"
  "그러제라."
  "근디, 재판받을 사람이 누구다요?"
  "금메, 다 싯이라는디, 둘언 몰르겄고, 남치기 하나가 삼봉이랍디다."
  "워메! 글먼 삼봉이럴 쥑인다 그 말이요?"
  "고것이야 나가 워찌 알겄소. 재판이 열려봐야 알일이제."
  "아, 재작년 시월에 인민재판허는 것  보고도 그리 태평헌 소리 허고  앉었소? 그때 봉림
김 부자말고 살아난 사람이 워디 또 있습디여?"
  "그때 죽은 것덜이야 다 죽을 만헌 제겐덜 아니였습디여? 김부자가  살아났대끼 삼봉이도
살아날란지 워찌 알 것이요."
  "지발 존 일 헌다고 삼봉이는 살아났으먼 쓰겄소. 잘못이야  모타진 새경 한파수에 안 내
줄라고 헌 이춘삼이가 잘못혔제 삼봉이가잘못헌  것이 머시가 있소. 삼봉이  잘못이 있다먼
기운이 너무 씨서 이춘삼이럴 패대기친 것뿐이제라. 죽이잔 것도 아니겄고, 벌떡증 일어나는
성질 못 참아 딱 한분 패대기친 것인디, 죽기야 이춘삼이 지눔 맘때로 혀뿐 것 아니겄소. 사
람이 그리 허망허니 뒤진다면야 누가 쌈판 아니라 씨름판이라도 지대로 벌리겄소. 이춘삼이
가행투 고약시럽고 느자구웂이 헝께 귀신이 딱 종그고 있다가 삼봉이가 패대기럴 치자 옳다
꾸나 이춘삼이 숨통에 찰싹 달라붙어뿐 것이요."
  "금메 그 말 한분 찰방지게  아구가 맞기는 허요. 근디, 서운상이란  사람맹키로 빙신이나
되얐으먼 몰르겄는디, 아조 죽어뿌렀이니 고약허덜 않소."
  "삼봉이 그 심덕허고, 장개도 한분 못 가보고 죽기넌 너무 시퍼렇고 억울헌  나인디. 같은
편인디 워찌 잠 살려내는 쪽으로 안허겄는게라?"
  "금메 말이요, 그리만 됨사 을매나  좋겄소. 군당위원장님이 원체로 엄허고  강단져논께로
워찌 될란지......"
  "그럼스로도 인정이 있다고 안 그럽디여?"
  "긍께 그 대목얼 믿고 일이 잘 풀리기럴 바래야제라. 낼 곡 나와야 허요잉?"
  "하먼이라, 삼봉이가 걸린 일인디 우리 동네사람덜이 싹 다 나가야제라."
  회정리 삼구 사람들은 거의 가 지삼봉의 일을 걱정했다.
  일찍 떠오른 팔월의 해는 오전  아홉시쯤에는 벌써 불볕으로 변하고  있었다. 남국민학교
운동장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운동장가를 빙 둘러가며 무성한 잎을 드리
우고 있는 플라타너스나무 그늘 아래는 발디딜 틈이 없이 사람으로 차 있었고, 그늘 차지를
못하게 된 사람들은 조회대 앞에서부터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밀려드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제각기 떠들어대는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운동장을 부풀리고 있었다.
  "와따메, 머 묵자고 날 더운디 저리  꼬약꼬약 밀어닥치는지 몰르겄네?" 일찌감치 그늘을
차지하고 앉아 담배를 말던 한 남자가 교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넘 말허고 앉었네. 자네
넌 멀 묵자고 나앉었능가?" "허 그 사람 벽창호시. 나야 그늘 차지나 혔응께 귀경을 지대로
헐 참이제만 인자 들오는 사람들이야  땡볕에 푹푹 익을 참인디, 워쩔  심판이냐 그것이네."
"자네 말허는 뽄새가 똑 못된 지주눔 심뽀로시." "거 먼  소리여?" "아, 그늘 차지혔으먼 가
만히나 있을 일이제 워째 넘 복장  긁는 소림나 허냔 말이시. 저 사람덜도  다 속에 맺히고
꾀인 것이 있는디다가, 참말로 인공시상이 지대로 터잡은 것 보자고 나오는 것인디,  떡허니
그늘 차지허고 앉어서 허는 자네 소리 들으먼 에진간히 좋아라 허겄네. 자네 심뽀라는 것이,
괴기반찬에 쌀밥 배터지게 묵고 나서 개떡 묵는 작인보고, 고것을 무신 맛으로 묵냐고 허는
못도니 지주눔 심뽀허고 같으다 그것이네." "워따, 사람얼 비혀도 워찌 그리 못되 디다가 비
허고 긍가? 사람이 무참혀서 워찌 고개 들겄능가?" "긍게로 말 씸벅씸벅 허덜 말어." "아이
고 알겄네. 근디 말이시, 참말로 인자 인공시상이 지대로 터럴 잡을랑가?" "경상도 부산꺼지
뺏을 날이 낼모레고, 농지개혁도 금방 새로 실시헌다고 허니께  그리된 것으로 봐야 안허겄
는가." "그리 되면 피난간 지주고 유지덜언 다 워찌 되는고?" "되갚음 당해야제워째." "사람
덜이 저리 몰키는 것도 인공시상에 바래는 것이 많기 땀세 그러는 것인디, 근디, 차등  웂는
공평헌 시상얼 참말로 끈허게 맹글어나갈랑가?" "믿어야제. 그간에 염상진이란 사람이 해온
것을 보먼 믿어도 손해날 것이야  머 있겄다고." "그리만 됨사  우리 농새꾼들이야 머럴 더
바래겄어. 식구수에 따라 공평허게 농토 배당받고, 지 논에 지 농새지어 지 새끼덜 배뜨시게
믹이고 갤치는 시상만 된다면야 무신 소원이 또 있겄어." "고런 미꼬미가 커간께로 날이 지
내갈수록 사람덜 맴이 인공 쪽으로 열리는 것 아니겄는가."
  "재판받을 사람이 누구누군지 누가 아요?" 운동장 가운데서 손차양을 만들고 선 중년남자
가 광고라도 하듯 큰 소리를 질렀다. "음마, 활동사진 볼라고 자리잡고 앉어서 그 이약 허라
는 것맹키로 싱건 소리시?" 어느 여자의 야물딱진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와따, 말에 고물 묻을 성불러 그리 초라니방정으로  말얼 받는다냐? 뉘집 메누린지 몰라도
시엄씨 콧두레 열 분도 뀌겄다." "아이고 메 뉘집  남정넨지 몰라도 지집 가심에 불화로 시
무 개는 올렸겄다." 다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에이 재수대가리 웂이, 그 주딩이 방정맞기
는...... 백여시가 따로 웂네." 남자가 혀를 차대며 자리를 옮겼고, "하이고 워짤끄나, 저리 눈
치코치도 웂음스로 그려도 남자꼭지라고 여자 무시허고 헛방구 뀔지는 아네. 저런 삼시랑이
인공시상이 멋이고, 인민재판이 먼지나 알고 여그 나왔는지 몰르겄네." 여자는  한 치도지지
않고 대거리를 해댔다. "히히히, 여수댁입심에 저 남정네가 잘못 낚인 것이제. 하여튼지간에
입심만으로 허자먼 자네야 영축웂이 여맹위원장깜이랑께로." 옆에 선 여자가 어깨를 들썩이
며 웃었다. "요봇씨오, 인자 입덜 봉허씨요. 시작허요." 어느 남자의 목소리였다.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인민위원회 발족식 때보다도 훨씬 많았다.  그 사람들 틈에 송경
희도 섞여 있었다. 그녀는 천리길을  걸어오며 쌓인 굶주림과 노독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열흘이 넘게 앓아 누워 있다가 일부러 몸을 일으킨 것이다. 어떤  꼴들을 하는지 똑똑히 보
아둘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운동장에 나와 차츰 기가  질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몰려드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떤 구체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
고 있었다.  그건 인공치하라는 달라진  체제에 대한 느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기분은 자기와는 정반
대였던  것이었다. 무식하고 무지렁인 줄만 알았던 그들은 속으로는 겉과  전혀 다른 딴 생
각을 품고 있었다는 결론이었다. 그 확인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는  절망이 되었다. 그전과
같은 세상은 다시  안 올지도 모른다......  이 절망감을 그녀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친애하는 벌교인민 여러분! 위대한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저금부터 반동분자와 해당분자
에 대한 인민재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을 받을 반동분자는 자칭 멸공단 단장이었던 윤태
주, 그리고 청년단 단원이었던 오칠성 둘이며, 해당분자로 지삼봉 하나입니다. 그럼 첫 번째
로 인민위원장 동무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마이크를 타고 나오는 이지숙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게 운동장 전체로 울려 퍼지고  있었
다. 조회대 앞에는 센 사람이 각기 팔이 뒤로 묶인채 세워져 있었다. 인민위원장으로 조회대
에 오른 사람은 남국민학교 교감이었다.  그는 서민영 다음에 교섭이 이루어져 위원장을 맡
게 된 것이다. 읍민들이 갖는  신망도는 서민영에 미치지  못했지만 사회개혁의지를 가지고
교육자의 품위를 지킨 점이 그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하대치는 부위원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에에,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지금은 혁명의 깃발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펄럭이고, 따라
서 삼천만 동포의 가슴마다에도 혁명의  열기가 끓어넘치고 있습니다. 인민이 주인이  되고,
인민이 세우는 인민의 나라를 위해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이 시기야말로 혁명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가차없이 없애야 하는 중대한 때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때에, 멸공단이란  테러
단체를 만들어 혁명전사의 가족들에게 사적 보복행위를 자행하여 인명살해까지 범한 윤태주
의 반동행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 인민을 탄압하고 괴롭힌 경찰의 앞
잡이로 혁명사업을 방해하고 인민생활을 갈취하는 파렴치행위를 일삼아온 청년단에서  행동
대로 날뛴 오칠성의 반동적 죄과도 절대 용서될 수가 없습니다. 끝으로, 혁명은 무질서를 자
행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사적 감정을 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미리 선전했음에도 불
구하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민청원의 입장에서 사적인 이유로 살인을 저질러 당이 정한
신성한 규율을 파괴한 지삼봉의 해당행위도 그냥 용서될 수  없는 중대사입니다. 혁명의 올
바르고 빠른 성취를 위해서는 이런 반당적 반동적 행위자들은 가차없이 처단해야된다는  것
을 당과 인민 앞에서 주장하는 바이올습니다."
  인민위원장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조회대를 내려갔다. 운동장에 빽빽하게 찬 사람들은 모
두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운동장 가득 햇빛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두번째로, 군당부윈원장 동무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안창민이 조회대로 올라왔다. 그는 사람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둘러보고나서 안경을
밀어올렸다.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여기에 무엇하려고 모였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구
경하려고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혁명을 하기 위해, 해방되기 위해 여기 이렇게 햇볕
아래 모여있는 거입니다. 혁명은 무엇입니까? 살기 좋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해
방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못살게 굴었던 모든 악독한 인간들을 쳐 없애고 우리가 주인이 되
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멸공단장 윤태주와 청년단원 오칠성은 바로 그 악독한 인간들 중
의 하나씩입니다. 인민을 피흘리게 한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피를 흘려야  할 차례를 맞은
것입니다.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마땅히 처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이 정한 규율은 엄격히
지켜져야 합니다. 혁명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특히 더 그러합니다. 한 사람이 규율을  어기면
열 사람이 본받고, 열 사람이 본받아 잘못 행동하면 백 사람이 또 뒤따르게 되고, 그렇게 되
면 결국 혁명은 이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민청원 지삼봉  또한 죄값을 받아 마땅할 것
입니다."
  말을 마친 안창민이 사람들을 휘둘러보고는 조회대를 내려갔다.
  "끝으로, 군당위원장 동무의 발언이 있겠습니다."
  염상진이 뚜벅뚜벅 조회대로 올라섰다. 그는 똑바로 서서 한동안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큰
키가 더 커 보였다.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많이 모이신 것은 바로 혁명을 이루고자 하
는 뜻이 여러분들의 가슴속에서 저어 해만큼 타오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든 중요한
발어은 인민위원장 동무와 군당부위원장 동무가 했습니다. 저는 두 동무의 발언에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반동분자 윤태주,오칠성 그리고 해당분자 지삼봉을 총살형에 처함에 있어서  인
민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조옿소오!"
  어디선가 외침이 터져올랐다.
  "좋소, 죽이씨요!"
  외침이 이어지며 박수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먼, 윤태주 저눔은 악질이여." "오칠성눔부텀 쥑여라아." "총알 아까운디 대창으로 죽여
뿌러." 이런 외침들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박수소리가 물결을  이루며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
었다.
  당중앙의 지령에 따라 염상진은 가급적  인민재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의
인민재판은 민청원 지삼봉의 살인사건을 다루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사람들은 누적된
계급적 원한과 군경한테 입은 여러 가지 피해를 사적으로 마음대로  풀 수 있는 것이 '인민
해방'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많았고, 군내에서도  그런 행위가  벌써 몇 군데에서  벌어지
고 있었다. 특히 야산투쟁에서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가족들이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에 대한 적지 않은 압력이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장을  더없이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직원이 사적 감정으로 벌인 살인을 방치할 수도, 더구나  옹호할
수도 없었다. '인민해방'은 무질서가 아니라  엄격한 질서의 진행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야
했던 것이다. 도당에서 질서회복을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송경희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이를 앙다문 채 조회대에 버티고 서있는 염상진을 노려보며
박수를 따라서 치고 있었다. 혼자  박수를 치지 않았다가는 금방 반동으로  찍힐 것 같았던
것이다.

[태백산맥] 인민재판_3

    15. 김범준의 귀향

  "그게 바로 문제요. 당에서는 너무 당연한  문제니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오.
오해로 생긴 물의가 보고되고 있을 테니 뒤늦게 설명하게 될  거요.  그런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시행착오나 오해가 그 동안에 어디 한두 가지였소. 그 대표적인 예가 인민재판 아니겠
소? 김팔봉의 인민재판을 놓고 김형이  비판하고 예측했던 바가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잖
소. 여론을 들어보면 그런 식의 처형방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형편이니, 김형 판
단대로 당은 시범적인 일을 한다고 해놓고 오히려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게 되고  말았
소."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런 식의  시행착오는 북쪽사람들이 갖는 우월감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너희들을  해방시켜주었다' 하는 식으로 노
골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그런 사고방식이 내부로는 위화감을 조성시키고, 외부로는  일방적
인 시책 실시로 나타나다고 봅니다. 신문사에는 그럼 분위기가 없습니까?"  손승호는 영 언
짢은 얼굴이었다.
  "왜 없겠소. 기자들 사이에서도 그 점이 아주 미묘하게 작용해서 신경을 자극하는데, 어차
피 사람이니까 그런 우월감이나 과시욕구가  없을 수 없는 일이지만, 좀  심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소. 분야마다 그 문제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혁명이나  해방이
라는 근본정신에 위배되는 행위고, 시급히 비판  수정돼야 할 문제요."  "제가 보기엔  당의
지령이나 지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오?"
  "당이 애당초 그런 예방교육이나 지시를 안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건 우린 전체의 자질이나 수준에 문제가 있는  거지요."  "아주 예리하게 보는 것
인데, 하여튼 인간은  상대적 감정의 동물이니까 받아들이는 쪽에도 다소의 문제는 있을 것
이고, 앞으로 좋아질 것을 믿고 토론을 통해서 시정발언을  적극적으로 하고 해서 고쳐지도
록 서로 노력합시다."
  이학송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한 가지만 여쭤보겠는데요, 해방일보가 폐간되고 딴  신문이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입니까?"
  손승호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학송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방일보는 진작에 없어져버린 남로당 기관지를 복간시킨 것에 불과해 아무 의미가 없으
니까 로동신문으로 바꿀 거라는 말이던데요."
  "아, 그 말이요? 그런 소문이 조심스럽게 돌고 있긴 한데, 우리로선 말하기 곤란한  저 최
상부층과 직결된 문제 아니겠소? 그 문제에  대해선 아는 것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소."
이학송은 잘라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손승호도 입을 다물었다. 김범우는 직감적으로 박과 김, 두 사람을 떠올렸다. 권력구조 속
에서 정점을 향한  갈등이나 마찰이 발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수행되는 속에서도 그것이 병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김범우는 권력을 향한 인간의 치
열성을 다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보도록 합시다. 참 김형, 김팔봉의 인민재판이 있고 며칠 뒤에 서울
이남에서는 인민재판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당중앙이 내렸소."  이학송이 자리를 털고 일어
섰다.
  "그래요? 그것 참 잘했군요."
  김범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백산맥] 인민재판_2

   6.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싸움 - 김범우는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느리게 뿜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또 염상진이
생각났다. 김범우는 그의 생각을 떼쳐내려고 했다. 육 일째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동안 신물
이 나도록 그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투철한  의식의
사회주의자가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토록 성급한 공산주의자로 변할 줄은 몰
랐었다. 그의 지성은 어디로 증발했기에 인민재판을 주도할 수 있었으며, 공개처형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죄 지은 자의  죽음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그 즉흥적인  방법과 감정적 행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전개하고 있는 싸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
다. 그는 말할지 모른다. 그런 공개처형은 인민의 선동과 동원을 위해서 혁명과정에  필수적
인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방법은 이미 혁명을 성취시킨 나라에서 사용한 것이라고.
  김범우는 염상진을 밀어내고 아버지를 생각하려고 했다. 문 서방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인민재을 치르고 난 다음부터 몸져누은 모양이었다.
"의사 선상님도 댕겨가시고 혔는디요, 벨 병은 아니라는디 어르신은 시름시름 앓으시는구만
이라." 문 서방의 설명이 없었어도 아버지의 병은 병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무사
했다고는 하지만 인민재판을 받은 아버지의 심적 타격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았
다.

[태백산맥] 인민재판_1

   제 1 부 한의 모닥불 3. 민족의 발견 .. 중에서

 "작은서방님, 작은서방님,   어르신네가, 어르신네가  살아나셨구만요, 살아나셨다니께요."
문 서방이 사립문을 차고 들며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무슨 소리요, 문 서방!"
  "긍께 머시냐, 이, 이, 인민재판에서..."
  김범우는 전신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허탈에 빠져 비칠비칠 주저앉으며 말했다.
  "자세히 얘기해보시오."
  "긍께, 어르신 차례가 되얐는디, 워메 참말로 환장허겄등거. 어르신네는 두 눈 딱 감고 단
상에 꼿꼿허게 스셨는디, 누가 벌떡 일어남스로 소리질르기를, 김사용은 지주지만 인민의 적
은 아니다. 큰아들 범준은 독립투사고 김사용은 독립자금을 댔다. 인민의 피를 제대로 쓴 것
이다. 고것만이 아니라 큰아들 김범준은 해방되고 삼 년이 지난 지끔꺼정 소식이 웂다. 못헐
말로 죽은 것이라면 조국 독립을 위해 하나뿐인 목심을 바친 것이다. 그라고 지주 김사용은
작인들헌테 질로후허게 헌 사람이다. 그건 시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렁께 김사용은  숙청에
서 빼야 헌다, 고 허드랑께요. 그 말을 위원장이 접수헌다고 발표허고는 또 모인 사람들헌테
워떻게 헐랑가 묻드만요. 우메, 고때 사람 미치겄등거. 근디 여그저그서 옳소, 옳소, 허는 소
리가 터짐스로 박수를 안 치겄소. 워메 나는 이때다 싶어 목구녕이 찢어지라 옳소, 옳소, 소
리질르고 손바닥이 떨어져나가그라 박수를 쳤구만요. 그려서  어르신이 화를 면허시고 단상
을 내려오시는디... 지가 쫓아가 어르신을 부축험시로 을매나 죄시럽고 눈물이 나든지..."  문
서방은 목이 잠기며 눈물을  훔쳤다. 그런 문 서방의 그지없이  착하고 선량함이 그의 가슴
을 뭉클하게 했다.
  "고맙소, 문 서방. 너무 애썼어요."
  김범우는 애써 웃어보이며 말했다.
  "무신 당찮은 말씸이시다요. 정작 고마운 사람은 따로 있제라. 어르신 구헐라고 나선 하대
치란 사람 마리어라우."
  하대치, 귀에 익은 듯한 이름이면서도 딱히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구요?"
  "하매 작은서방님도 알 성불른디요. 위원장 염상진얼 그림자맹키로 따라댕김서 빨갱이 허
다 징역살이도 항께 헌..."
  "아, 알았어요."
  김범우의 기억 저편에서 흐리게 떠오르는 사내가 있었다. 얼굴 생김은 거의 기억이  없고,
키가 작은 다부진 체격에 꼭 돌덩이 같은 인상을 풍기던 사내였다. 염상진이 출감해서 돌아
오던 날 역에 마중 나갔다가 보았던 것이다.
  "하대치 그 사람이 어르신네 소작을 부친 것도 아니고,  무신 은혜럴 입었다고 그리 발벗
고 나섰는지, 참말로 몰를 일이랑께요."
  문 서방은 영문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건 염상진이 꾸민 완벽한 연극 이었다. 그러나 대사
로 사용된 아버지의 행적가지 연극은 아니었다. 그건 있는 그대로였다. 남들과 똑같이  체로
를 해가고, 인민재판에 회부하고, 부하를 기켜 발언하게 하고, 그리고 석방시키는 과정을 거
친 염상진의 의도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다. 공적인 목적과  사적인 정리가 복합적으로 작
용했을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별로 흠 잡힐 데 없는  아버지를 인민재판을 거쳐 석방시킴으
로써 자기네들의 공정성과 신중성을 널리  선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주들을
처단하는 확실한 이유 설명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그의 어린 날로부터 따뜻한 정과 깊은 이해를 베풀어온 아버지를 떳떳하게 보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 번의 행위로 두 가지 이상의 목적을 충족시킬 줄 아는 염상진, 그는 역시 단세포
가 아니었다.
  "헌디 말이요, 서방님. 인민재판이라등가 먼가가 끝나고  쥑이는 굿판이 벌어졌는디, 워메
징허기도 허고..."
  "어디서 말인가요?"
  김범우는 문득 생각에서 깨어나며, 한결 느긋해진 태도로 말하고  있는 문 서방에게 눈길
을 돌렸다.
  "워디긴 워디어라, 북국민핵교 마당에서 인민재판을 끝내고  그 질고 소화다리로 끌고 갔
구만이라. 사람덜이 벌떼맹키로 모였는디, 사람덜헌테 귀경시키대끼 줄줄이 세워놓고 쥑였당
께요."
  "문 서방도 그걸 구경했단 말이오?"
  "하먼이라, 징허기는 혔오도 그건 돈 내고도 못헐 존  귀경거리였는디요."  "그게 무슨 소
리요, 문 서방. 남들은 죽어가는데 그걸 보고 좋은 구경거리라니."  김범우의 음성은 뜨거웠
고 눈 가장자리에는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존 귀경거리고말고라. 죄는 진 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간다고, 즈그눔덜이  평소에 웂
이 사는 사람덜 아프고 씨린 맘 몰라주고  행투 고약허게 해감서 배 터지게 묵고 살았응께
고렇게 당혀서 싸제라. 고것들이 하나씩  죽어자빠지는디, 씨엉쿠 잘됐다. 씨엉쿠  잘되얐다,
허는 소리가 속에서 절로 솟기드만요. 고런 맘이 위디 나 혼자뿐이었을 랍디여. 말을 안혔응
께 그렇제 귀경허는 전부가 다 똑겉은 맘이었을 꺼구만이라."  문 서방은 완전히 다른 사람
으로 돌변해  있었다. 그의 눈은 증오로  타고,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김범우는
하나의 악마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머금던  아까의  그 착하고 선량하던 모
습은 간 곳이 없었다. 김범우는 섬뜩하게 끼쳐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문 서방, 애썼어요. 그만 쉬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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